사람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음을 향하여 끊임없이,
쉼 없이 나아 가지만 아무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다 어느날 병이라는, 사고라는 불청객이 찾아 오면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자각하기 시작하고,
그나마 상태가 위중하거나, 심각하지 않으면 안일한 습성에
젖어 망각으로 묻혀져가는 것이 사람의 사고방식입니다.
사람은 살기위해 태어 났지만 범죄한 유전자의 죄값으로
고통중에 사망으로 향하고 있는데, 잠깐 슬프면 되는 죽음의
고리를 당연시 하며 또 살아가는 것이우리의 삶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생각과는 높고, 사람의 길보다는
다른 차원으로 인생들을 인도하시려 6천 년 간 역사 해 오셨지만
우매무지한 사고가 하나님을 입으로만 믿는다 하는 맹목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으로 변질돼 버린 것입니다.
지금의 때는 오늘날 예수님께서 처소를 예비하시면 다시오마 하신
재림의 때, 추수의 때이며,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의 뜻과 계획대로
이 땅에 이루어 가시는 때에 우리는 살아 가고 있습니다.
초림때 하나님을 열심으로 믿었던 유대인들은 어떤 모양의 메시야를
기다렸던 것일까요 ?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다고 하시며,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고,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
(사52 :14~, 53 : 2~ 참고)라고 기록해 두셨지만, 겉 모양만 상상하고
불꽃중에, 구름타고 오실 능력의 구원자를 막연히 기다린것은 아니었을까요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하셨고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라고 하셨습니다(사 53 : 5~ 참고).
암행어사가 된 이 몽룡이 춘향이를 찾아 갔던 모습을 비교하면
어불성설일까요? 문자에만 얽매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한 메시지는 무시하고 자기의 생각대로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로
우리의 신앙이 석고처럼 굳어 버리지는 않았을까요 ?
에디오피아 국고를 맡은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기를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고 했듯이(행 8:27~31 참고),
신앙인들은 누군가에게 배워야 하지만성경을 배우면 무슨 큰일이라도
날 듯 흑암에 갇혀 있는 신앙인들의 현 주소를 어떻게 깨우쳐 줘야
하는 것일까요 ?
떠나가신 하나님,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평화의 나라를
통치하시길 원하시며, 약속한 목자를 통하여 그 뜻을 펼치고 계심을
깨달아야 할 때입니다. 인생은 영원히 살 존재들입니다.
새 언약을 지키고 행하는 자들만이 천국도 구원도 영생의
주인공들이 될 것입니다. 알아야 면장(免葬)할 수 있습니다.
현명하고 똑똑한 신앙인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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