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가 한 풀꺾인 아침이 싱그럽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 없듯이 성경의 순리또한도 창조주의 뜻안에서 이루어가고 있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주체를 모르고 자신만은 예외일것만 같은 착각속에서 살아들 간다. 누군가가 얘기한다. 자기는 비우며 살기를 원하며 노력한다고 했다. 비우고 나면 무엇을 채울거냐고 물었다. 답을 못한다. 비우고 나서 생각한다고? 과연 비울 수 있을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물과 성령은 무엇일까? 내가 마시는 생수회사의 물일까? 이미 지나간 마가다락방의 그 성령일까? 우리는 때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시대를 모르고 신앙을 한다면 맹신의 늪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똑똑한 신앙인이 되자고 약속의 목자께서는 강조하신다.
성경을 통달하자. 어떻게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아래배너를 클릭하자! 모태신앙이라고 은근자부하면서 지옥을 향하여 열심히 가는 줄도 모른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예수님께서는 밤에 도적같이, 구름타고 나팔불며 오신다는데 창공만 바라보며 있다면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은 비사, 비유가 아닌 밝히 얼굴과 얼굴을 보는 때임을 알아야 한다. 들려주고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천국과 구원과 영생을 소망한다면 클릭하는 수고는 해야 한다. 그리고 두드리고 찾아야 한다. 천복을 소유하고자 한다면 말이다.
세상의 모든거민, 지상에 거하는 너희여 산들 위에 기호를 세우거든 너희는 보고 나팔을 불거든 너희는 들을찌니라(사18:3~참고)하셨다.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그 허물을, 야곱집에 그 죄를 고하라(사58: 1참고)하셨다.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계14:1~참고)라고 기록하셨다. 40여 년을 성당에 다녀도, 모태신앙이라고 은근 뼈겨도 하나님께서 세운 기호가 뭔지, 산들이 어디인지, 나팔이 무엇인지, 멸망의 가증한 것이 무엇이며, 거룩한 곳은 어디인지 아는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하라 하셨는데 이 산은 어디인지 아는가?
계14장 1절의 어린양과 시온산과 십 사만 사천의 실체를 아는가? 하나님께서는 천국을 비유로 감춰두시고 징조를 보여 주시며 찾아 오라고 하셨다. 알고 신앙하는 자만이 천국과 구원의 주인공들이 될 수 있다. 맹신이 도를 지나면 광신이 된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신앙을 한다고 해서야 체면이 말이 되겠는가? 무지한 밤에서 깨어 나자. 이제 마지막 나팔인 일곱째 나팔이 불려지고 있다. 그것도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 알아야 면장(免葬)을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만물 속에 감춰 두시고 찾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경배하자. 성경을 100독 한다고, 필사를 수없이 한다고 알 수 있는 것이라면 666표를 바코드라고 하겠는가? 그것도 자신이 연구를 했다나 어쨌다나?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목사님께서 말이다. 유명하다고 하는 목회자의 성경지식이 바닥을 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보시며 얼마나 애통해 하실까?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신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은 다 믿더라고 하셨다. 자신은 영생을 받기로 작정된 자일까? 굳이 기독교신자가 아니어도 영생의 반열에 들 자가 있다는 것인데 언제까지 기득세력을 자랑만 하고 있을 것인가? 억지나 부리고 외식하는 신앙, 우상숭배에 길들여져 있는 맹신의 늪에서 빠져 나오자. 손잡아 주신다 하지 않는가? 잃어버린 한마리의 양을 찾으려 노심초사 하시는 새 목자의 나팔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그리고 이 나팔이 불려지는 시온산을 찾아 나서자. 진심으로 천국과 영생을 소망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