뭇시선들을 즐기며 있다. 하루살이는 하루가, 메뚜기는 한 철이 전부인데
사람들은 백세를 외치며 각자의 인생의 그림을 채워 나간다.
하루 평균 사망자수는 630여명이 넘는다고 한다. 아파서, 불의의 사고로 또는
스스로 택한 죽음등이 있다. 창조주의 계획은 신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시기
때문에 사망을 작정하진 않으셨다.
그러면 인간들은 왜 태어나면서 생노병사의 노정을 동행해야 할까? 해결책을 찾지
못한 걸까? 아니면 거부할 수 없는 순리에 잘도 적응하는 걸까?
태초에 아담을 빚은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을 지키며 다스리라고 맡기셨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당부하셨지만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도했고, 그로 인해 사망이라는 이름이 권세를 누리기 시작했다.
시대마다 택한 사람들을 통해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나 악은 차고 넘쳐 관영함에
이르렀다. 구약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셨고, 처소를 예비하여 다시 오마 약속하신
신약의 주인공은 누구실까?
거부할 수도, 멈출 수도 없는 신의 역사는 보이지 않을 뿐 시간을 따라
성경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신다고 하셨다.
깃발은 이미 올랐고 휘날리며 있다. 찾는 자에게 복을 주시려고 말이다.
언제까지 도외시하며 수수방관 할수 있을까? 아득한 옛날, 신을 대적하고
가장하여 여태껏 잘 먹고 잘 살았으면 이제 무저갱의 쓴맛을 느껴봐야 한다.
나팔을 불어 회개의 기회를 주시며 돌아 오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계시지만
마지막 역사의 장이 마무리 되며, 하나님께서 청하여 씻음받은 푸른 싹들이
생명의 구원속으로 뿌릴 내리고 있다. 영원한 대속의 부활로 다져져 가고 있다.
신앙의 목적과 소망이 신기루를 보는 것이 아닌 실체를 보며 할렐루야를 외치며
있다. 계시록은 영혼 구원이 없고 모르면 모를수록 좋다고 설교를 하는 목사님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단상을 차지하고 있는지 황당하다.
요한계시록 1장1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 않는가?
예수님의 말씀은 몰라도 된다는 결론인데 도대체 목사라는 분은 예수팔아 장사하는
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 할 수 밖에 없다. 죄송하지만.....
몰라도 되는 책이라 봉해 두셨다고? ㅎㅎ 봄풀은 감상이라도, 눈을 즐겁게라도
해 주는데, 주의 종이라는 이름을 달고 창피한 줄 알았으면 좋겠다.
요한계시록은 신약의 종합편이라고 하시며 보고 들은 증인이
이것들을 증거하며 밝히 알려 주고 계신다. 확인해 보고 싶지 않은가?
요한계시록을 모르고 신앙을 한다고 할 수 있을까?
만물을 소생케하는 생명력은 창조주의 권한이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절대권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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