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cheon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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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26일 월요일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가?




사람들은 오래 건강하게 살고 싶어한다. 오래 살기의 비법이 있을까? 
구구팔팔 이삼사라는 신종어가 있다. 구십 구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 삼일 
아프고 죽음을 맞이한다는 죽음의 이상향이다.

사람의 3대 거짓말에도 죽고 싶다는 말이 있다. 오래 건강하게 즐겁게 살고픈 것은 
나이들수록 민감해지는 부분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염원을 어떤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과연 답은 있을까? 답은 존재하지만 쉽게 찾지 못하도록 숨겨져 있다.  

이 답이 성경 속에 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너희로 하여금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와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라고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은 범죄치 않는다고도 하신다. 







쉬운 듯, 어려운 듯 감은 없을 것이다. 건강과 젊음을 위해서라면 모든걸 아끼지 않는 
인간의 사고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돈 없이 값 없이 받으라고 하셨는데 공짜는 
신빙성을 못 느끼나? 가치를 재고 할 수 없는  말씀을 거저 준다는데도 바보같이 
이단타령이나 하는 무지를 심판할 날이 있을 것이다. 

약속도, 이루어지는 성취의 실상도 모르면서 어찌 신앙을 논할 수 있으랴, 세월은 
유수같고 덧없이 간다라고 한탄만 하지 말고 오래 영원히 신과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선택하길 바란다. 하나님의 역사는 손톱이 자라듯 홀연히 이루어 진다. 일점 일획도 
가감없이 이루시는 사랑의 실체를 찾는 행운의 주인공이 되길 기도한다.





2018년 2월 25일 일요일

밤에 속하지 말고 나오라고 부르신다!





이제는 신부님께서도 성추행의 가쉽에 오르내린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점은 이성이
있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나마 절제의 미덕을 가져야 할 목회자가 자신을 어쩔 수 
없다며 이해를 구하는 이 황당함을 어떻게 수용해야 하나?

본능이라고 하기엔 가혹한 것일까? 차라리 개신교처럼 결혼을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적이지 않을까싶다. 오래전 보았던 기적이라는 영화를 떠오르게 한다. 금욕을 
제어 할 수 없다면 수도의 길을 선택하지 말든지, 꼴뚜기같은 선례를 남기지나 말든지.....

유명한 고승들도 숨겨둔 자녀로 일화로 역사의 한편에 머물 러 있기도 하지만 그들은 
요즘처럼 심한 질타는 문명의 혜택을 심하게 보았다고 해야 하나?
 




사람은 사람답게, 신앙은 올바르게 해야 하지 않을까? 목회자의 두 얼굴로 또 다른 
꼴뚜기도 존재한다. 한기총과 기독교 방송인 CBS이다. 세상의 거룩은 다 가진듯 
포장하며, 돈으로 명예직을 사고 팔며, 개종이라는 명목으로  신앙세계를 기롱하는 
개종목사의 파렴치는 응징을 받아야 한다. 

대형교회는 부자간의 세습으로 세간의 이슈가 되고 종교계는 혼돈과 공허와 
어둠뿐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 흑암한 세력들을 언제까지 지켜 보실 
수 있을까?

지금은 밝히 보여 주시며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도 받지말고 나오라고 
하신다. 어디로 가야할까? 좁고 협착한 길을 따라  용기 내어 걸어보자. 신앙을 하고 
있다면 말이다. 부르고 빼내어 주실 때 감사함으로 나아가자.

이 땅에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불려지는 일곱째 나팔소리를 확인하고 그 소리가 울려
퍼지는 곳으로 달려 가자. 때가 가까이 왔다. 밤에 속하지 말고 나오라고 부르신다! 
죄의 관영은 심판을 부른다! 회개하고 나팔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나가자.





2018년 2월 23일 금요일

Adam's apple, 금단의 열매!





아담은 선악과를 왜 먹었을까요?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겁도 없이 설마하고 꿀꺽했을까요? 
결론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 것이며, 뱀의 미혹을 분별하지 못하고 
너희의 눈이 밝아져 하나님같이 된다는 그럴싸한 말에 뱀과 하나가 돼 버린 
것입니다. 

먹지 말아야 할 선악과를 먹고도 930살을 향수하였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역사는 달라져 있었겠죠. 사망도 애통도 곡함도 아픔도 없는 
지상 낙원에서 하나님 모시고 평화의 세계를 누리며 살 수도 있었는데 세상은 
온통 혼돈과 흑암이 제 것인양 큰소릴 쳐대고 있으니 아담은 죄값을 톡톡히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아담의 범죄는 무엇으로 사함을 받을 수가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도 사망은 왕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 피의 효력을 기다리며, 
지키며 신앙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강림하실 때에 부끄러운 구원을 받을 자가 
되지 말고 첫째 부활의 주인공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맹신의 수치를 벗어 버리고 하늘의 것을 덧입는 영광을 고대합시다. 신의 
역사는 홀연히 이루어 짐을 알아야 하며, 흙인 아담이 생기로 생령은 되었으나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함으로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배도의 길을 가는 
되풀이는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역사를 알게 하신 이유는 거울과 경계를 삼아 
바보같은 신앙의 되풀이는 하지 말라고 주신 것입니다. 무지한 밤에서 깨어 
나야 할 때입니다. 역사속의 아담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도 모르고 어리석게는 
인류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목자밑에서 신앙을 하는 현실을 똑바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아담을 주관하고 있는 영은 시대마다 육체만 바꿀 뿐 하나님의 흉내를 귀신같이 
내는 사단 마귀인 것을 깨달아야 할 때임을 알려드립니다.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실 하나님, 예수님께서 오실 곳을 찾아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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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22일 목요일

내 속엔 무엇이 그리도 많을까?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조성모의 노래 가시나무 새의 일부이다. 처연한 것 같지만 우리의 신앙 고백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공감을 부르는 노랫말이다. 

사도바울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는냐고 기록하고 계신다(고전3: 16~참고). 내 속에 내 것이 너무 
많아 하나님의 성령이 드실 여유가 없는 우리 자신을 돌아 봐야 한다. 믿기만하면 
되는 것이 신앙은 아닐 것이다. 

지구촌에 20억이 넘는 인구가 하나님을 믿노라 하지만 내 속에 나를 버리고 성령이 
거하실 집과 밭이 준비되어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해야 성령께서 내 속에 임하실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신앙인이 있을까? 



하늘이 주시는 복은  모든 사람들이 소원하는 건강, 물질, 명예에 비할 바가 아닐진데 
이 엄청난 것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더한 것은 알려 주어도 모르쇠로 일관한다는 것이다. 
내 속에 또아릴 틀고 앉은 나는 누구이며 왜 자기집 마냥 나가려 하지 않는건지 자의식을 
깨어보자. 

나를 비워야만 떠나가신 성령께서 다시 오시지 않겠는가? 성경은 반드시 이루어질 
사실이며 현실임을 깨달아 부질없는 나를, 헛된 바램들로 썩어져 가는 것들을 소제하고 
깨끗한 집과 밭으로 거듭날 준비를 하자.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아버지나라 천국을 볼 수가 없다라고 하셨다. 꼼꼼하게  상고해 보자. 내 속엔 누구의 것으로 채워져 
있는지 나 자신을 확인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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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20일 화요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



누구나 꽃길만 걷기를 원한다.
승승장구는 내 길일 것만 같은 기대감에 밤잠도 설쳐 본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만만찮음에 좌절하며 우울해 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생육 
번성 충만 정복 다스리라고 하셨다. 

창조주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길로 가고 있는 괴리가 변화일까? 변질일까? 
예수님께서는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는데 그 시대의 종교인들이 
십자가에 돌아 가시게 했다. 과연 누구를 믿고 신앙 생활을 했단 말일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이었다. 
오늘날 재림의 때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께서 보내는 사자를 믿지 않는 것이 
그 증거이다. 성경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훼방하고 폄하하는 집단은 
창세기의 하와를 미혹한 뱀의 실체들이다. 육 천 년을 자랐으니 용이 되었다. 

물없는 광야를 주관한 용은 이미 잡혔다. 하나님의 통치 시대가 가까워 온다. 
사단의 농된 올무를 벗어 버리고 자유를 찾자. 진리는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무릇 지킬만한 마음을 다잡고 온전한 신앙을 하시길 기도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









2018년 2월 19일 월요일

말씀은 하나님, 말씀안에 생명이 있다.




4차 산업혁명은 새로운 문명의 세계를 향해 확장되어 간다. 매장도 정해진 
상품도 없이 개개인의 의사표현이 거대한 기업을 양산한다. 애플, 구글, 
페이스북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산업의 혁명이다. 자산 규모가 수억, 수조를 홋가한다. 이렇게 빠르게 변화하는 
익숙하지 못한 문명의 기기에 서투른 기성세대가 어찌 큰 소리를 내며 세계를 
아우를 수가 있을까? 

나와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아날로그를 고집하면 꼰대가 돼 버릴 수 밖에 없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나 비가 내리고 싹이 튼다는 우수를 기점으로 신앙의 
점검 기회를 가져보면 어떨까? 




제 아무리 세상의 과학이 첨단을 달린다고 해도 풀 한 포기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젖이나 먹는 어린아이의 초보 신앙에서 단단한 식물을 먹을 줄 
아는 장성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거듭나 보자. 

다윗의 글에 오랜 후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예언하셨듯이 
그의 음성을 듣는 너희는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셨다. 오늘날은 재림의 때이다. 
강림하실 주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오시는 곳에 가서 기다려야 할 때이다. 
성경을 믿고 신앙을 한다면 때 분별을 잘 해야 한다.

무조건 믿기만하는 신앙은 종교를 만드신 창조주의 뜻은 아닐 것이다. 보여 주시지 
않고는 절대 행하심이 없으신 하나님! 예언하시고 성취하신 실상을 본 사람만이 
년 월 일 시를 알 것이다. 문자에 매여 이럴것이다 저렇지 않을까하는 엉터리 목자의 
설교에 미혹되지 말고 똑똑한 신앙인이 되자.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위에 굳게 서며 작은 산위에 뛰어나며 만방이 
모여드는 곳으로 찾아가야 하지 않을까? 초보에 매여 역사나 교훈에만 믿음을 맡기고 
있다면 깨어 나야 한다. 예언하시고 이루시는 실체를 보고 믿어야 하는 장성한 
신앙인의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

신의 역사는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도 하셨다. 우리는 어떤 신앙을 
해야 할까? 성경대로 오신 약속의 목자를 만나야 하고, 진리의 성읍을 찾아야 하며, 밝히 알려 주시는 계시의 말씀을 경청해야 할 때다. 

진리의 샘에서 맑은 생명수가 흘러 나오는 성전을 찾아 나아 오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하나님은 말씀이시고 말씀안에 생명이 있다. 경이롭지 않은가?







2018년 2월 18일 일요일

영원한 생명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은가?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손길들이 바쁜 하루다. 구정과 신정의 차이는 
무엇일까? 음력과 양력의 단순한 의미에 불과할까?

성경도 구약과 신약이 있다. 옛 약속과 새로운 약속이다. 음과 양의 조화가 
신비로운 구와 신의 대조가 극명하다. 그러나 그 연결은 사람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창조주의 뜻과 계획과 생각을 기록한 책이라는 것이다.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도 있다 하지만 이 법률은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를 의술에 의지하여 부질없는 생명 연장은 법으로 금한다는 취지가 아닐까? 
누구나 살고 싶어한다. 죽으려고 작정한 사람도 있긴하지한 여건이 허락했다면 
죽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몸에 좋은 것만을 찾아서 먹고, 경관이 좋은 곳이라면 세계 곳곳을 누비는 
여유있는 모습은 부러움을 살 수도 있지만 생명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혼밥, 혼술, 욜로족이 성행한다지만 이 역시 살아 있어 
가능한 것이 아닐까?

말씀 안에 존재하는 생명을 먼저 찾아야 하지 않을까? 사람들이 망각한 
창조주의 말씀을 상기해야 한다. 눈으로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며 의지하여 
희노애락을 만들어 가지만 모두가 호흡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지금부터라도 말씀 앞으로 나아가자. 

아무나 찾을 수는 없지만 기도부터 먼저하자. 생명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불러 달라고 말이다. 언젠가 한번은 배워야 한다면 살아 호흡하고 있을 때 듣고 
깨달아 영원한 생명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영원한 생명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은가?








2018년 2월 17일 토요일

생명의 연장이 사람의 능력으로 가능할까?




건강을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 그러나 생명을 주관할 수는 
없다. 하루를 살아도 건강하게 살고 싶다는 말은 곧 오래 살고 싶다는 뜻일 것이다.

의술이 발달하면서 의미 없는 생명 연장의 부질없음을 간혹 목격하기도 한다.
경제의 위력이 또는 현실적인 벽앞에 가슴 아픈 결정을 해야 하는 무정함도 
어쩔 수가 없다. 다행인지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이 있음을 알았다. 

목적은 회생의 가능성이 없고 치료를 해도 회복 되지도,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되어 
사망에 임박한 임종 과정에 있다는 의학적 판단을 사람들에게 환자의 최선의 
이익을 보장하고 자기 결정을 존중하여 인간의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법률이다. 좀은 복잡하고 어려운 것 같지만 결론은 의미없는 
생명연장을 법으로 보호한다는 것이다. 






생명! 모태에서 나온 날 부터 사망을 향해 열심히 살아들 가지만 영원히 살 것 같이 
우연히 급격한 사고로, 자연스럽게 죽음을 외면할 수 없으며 피해 갈 사람은 없다.
그러나 성경은 영원한 생명을 말씀하고 계신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을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하신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아무리 의학과 의술이 발달한다 해도
생명의 연장이 사람의 능력으로 가능할까? 창조주의 권능에 도전하는 간 큰 사람이 
있을까? 무식하면 용감하다고는 했지만 불가능한 일이다. 생명을 누리기 위해 
창조주의 뜻과 목적을 알고 지킨다면 결과는 달라진다.  





영원한 생명을 유업으로 주신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친히 저희와 함께 거하신다고 
하셨는데 기대되지 않는가? 신앙은 제대로 해야 하는데 여지껏 맹신만 해 오지 
않았는가? 문자에만 매여 각자의 생각만 보태어 사람의 계명을 남발 해 왔다. 그리고
참 인양 역사를 쌓아 왔다. 전통이 정통을 옥죄어 잘난 척 하지만 이제 그 끝자락의 
몸부림을 하고 있다. 신의 권능을 감히 도전하려고 용을 쓰고 있는 것이다.

용은 하늘로 승천했지만 다시 바다로 쫓겨나 갈 곳을 잃었다.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고 발 붙일 곳이 없어져 버렸다. 진리를 이길려고 작정한 자체가 
어불성설이 아닐까? 이제 정신 차리자. 유업으로 주실 영원한 생명을 상속 받기 위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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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14일 수요일

6천 여 년을 인내하신 하나님의 심중을 가늠 할 수가 있을까?




평창 동계올림픽의 진행 상황이 실시간으로 중계가 되고 울고, 웃는 희비가 
교차한다. 4년 여를 얼마나 노력하고 준비를 했지만 순간의 실수로 예선에서 
고배를 마시는 선수들의 마음은 어떠할까를 생각해 본다. 

허탈, 아쉬움, 짜증, 분노 등이 섞인 복잡함에 괴로울 것이다. 이 안타까움을 
애잔한 마음으로 염려해 주면 응원이 될려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신 성경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의 심경을 짐작이라도 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하나님을 
알지도 믿지도 않던 무인시대에 흙인 아담을 취하여 생기를 불어 넣어 생령이 
되게 하시고 에덴동산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다. 




그러나 간교한 뱀의 미혹에 하나님과의 언약을 져버리고 죄의 근원이 되어 
육천 여 년을 욕받이가 되어 왔다.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선악과를 먹은 
결국은 사망의 세상에 권세를 빼앗겨 버린 것이다. 

이후로 노아와 언약하셨지만 가나안의 죄악이 심판 받았고, 솔로몬 또한도 
이방신을 섬기므로 나라가 분열되었다. 그리고 많은 선지자들에게 메시야의 
구원을 알렸지만 정작 예수님은 영접하지 않는 불충을 저지른 것이다. 

오늘날 재림의 때는 어떠할까? 예수님의 사자로 보내심을 받은 이긴자를 흠집 
내기에 바쁜 신앙인들을 어찌 하나님,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믿음은 소망을 더욱 견고히 하는 것이며 증거해 주시는 약속의 목자를 존경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지한 심령들은 사망을 주관하는 자를 사모하고 있으니 이를 
지켜 보시는 하나님의 심중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독생자를 희생시켜 죄의 대속을 베풀어 주신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짐작할 
수 있을까? 사람의 생각은 4년도 애통하고 아쉬운데 하나님의 6천 여 년의 장구한 
역사는 어디에 하소할 때도 없다. 하지만 성경대로 오신 약속의 목자께서는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신다. 한 맺힌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생각을 전하고 계신 것이다. 

원흉인 용을 잡고 하나님께서 통치 하실 나라를 건설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시고 하나님을 알아 주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영원한 
기업인 영생을 유업으로 주실 것이다. 멋지고 대단하지 않나?

신천지 예수교 증거장막 성전은 성경에 기록된 이름이다. 성경대로 이루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 찾기를 권면 해 본다. 6천 여 년을 인내하시며 기다려 주신
무한한 사랑과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2018년 2월 13일 화요일

구원보다 앞서는 장로의 명예!



모 대형교회가 또 도마위에 올랐다. 장로의 명예를 돈으로 사는 관행(?)을 
문제화 시킨 것이다. 누군가는 돈의 벽때문에 장로의 수순에서 탈락한 것은 
아닐까? 신앙도 이 늠의 돈이 없으면 기를 펼 수 없는 세상을 누가 만들었을까? 

10억을 뿌리면  당회장이 되고 5억을 날리면 패배의 쓴 잔을 맛봐야 하는 
이 악행을 누가 조종하는 걸까? 10억이란 거금은 교인의 헌금이 모여진 것일텐데 
한 개인의 명예를 위해 자신의 것인양 뿌려대는 현실이 안타깝다.

그래도 무지한 신앙인들은 우리 목사님, 우리 목사님을 외쳐댄다. 신앙은 성경대로 
해야 하는데 성경에 담겨진 뜻도 모르고, 시대분별도 모르는 밤같은 세상에 갇혀 
있으니 하나님, 예수님께서 반가워 하실까? 오신다고 강조하시는데 굳이 죽어서 
찾아 간다고 엇박자를 놓고 있으니 믿는자라고 인정을 하실까? 




신앙을 한다고 하면 우선 착함은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선입견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그래서 욕을 바가지로 듣는 경향도 부인할 수 없다.

제사보다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셨는데 목회는 뒷전이고 세상일에
간섭하다 참수 당한 세례요한의 전철을 밟고 있는건 아닌지 의문이 든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고 깨달았다면 이런 관행같은 더티한 사건은 생겨나지도 않았을텐데 
말이다. 

올바른 사고를 가졌다면 지지고 볶는데 시간 낭비하지 말고 온전한것과 내세의 능력이 
있는 곳으로 나아 오길 권면한다. 돈으로 사고 파는 명예에 목숨걸지 마시고 유황불못의 
죄를 사함받는 유리바다를 찾아 나아가자. 하나님께서 기다리며 인내하신 역사의 
마침표는 새 하늘 새 땅 신천지에서 선포하시기 때문이다. 귀 있는 자는 들을 것이다.




2018년 2월 12일 월요일

상상은 헛된 날개 짓에 불과하다!



잡생각이 많은 아침이다. 행동은 따르지 않는 상상의 날개짓만 하면서 시간 
낭비를 하고 있다. 감각은 무뎌지고 의욕은 상실 직전이다. 떨치고 벗어나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인내하시며 6천 여 년을 역사해 
오셨는데 부끄럽지도 않은가? 이런 상태로 영원한 생명을 소망한 댔어야 어디 쥐 
구멍이라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오로지 신천지 비방하기에 앞장서는 한기총이나  CBS방송은 거짓말 지어내기에 
바쁘고, 앞 뒤도 맞지 않는 작문 짓기에 지치지도 않는데 정신 차려야 하지 않겠는가? 

예언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목도하고도 환경과 여건을 핑계로, 욕심과 
타협하는 인간의 심지가 이해하기는 혈기를 부르지만 굳이 복을 마다하는 바보는 
되지 말았으면 하는 간절함은 있다. 






세상 법관도 육법전서를 꿰뚫고 있어야 판 검사가 되듯이 하늘의 심판권을 
주신다는데 핑계나 대는 바보같은 생각은 버려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께서 통치하실 
나라는 이 땅에 건설되고 있고 우리는 그 나라에서 불고 있는 나팔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리고 서둘러야 한다. 완성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죽느냐 사느냐 생사의 갈림길에서 자신은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할까? 
지금이 익숙하지 못하고 희생을 강요당하는 것 같은 이기심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포기해야 할까? 모래위에 지은 알량한 집으로 만족할 것인가? 곧고 튼실한 반석위에 
지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해야 할 것인지는 숙제다. 

그러나 오래 고민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내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이 영생을 
강조했다면 자신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받아 드렸을까? 불행하게도 그 교회 목자는 
보고 들은자가 아니기때문에 구원도 천국도 없다. 어째스까~~








2018년 2월 11일 일요일

진리는 어디에 있을까?



아직도 진리를 찾아 고민한다고 얘기하는 모 불교 방송이 버스 스피커를 
타고 나온다. 진리는 어디에 있을까?
예수님께서 말씀 하신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라고(요17:17~참고),

그런데 불행하게도 불교인은 성경을 모른다. 창조주는 한분이신데 사람의 
생각들과 욕심으로 인해 종교는 수백가지로 나뉘어 졌다. 내 말이 진리라고 
말씀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계시지 않는다. 그리고 그 진리를 
전파하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세상의 경서중에 약속하시고 약속대로 나타나는 실상의 경서가 성경외에 
또 있을까? 그림자를 소망하며 실체를 무시하는 오만과 편견은 이제 책장을 
덮어야 한다. 진리를 찾으려면 고민과의 시간싸움을 할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혹여 잘못될까하는 소심함이 진리를 수수방관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점검해 봐야 한다. 정보의 홍수는 참보다는 거짓이 우후죽순같이 늘려 있다. 
불교인이라면 존경해 마지않는 성ㅇ 스님도 사단이여 어서 오시라고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떠나셨다. 많은 중생을 지옥의 길로 인도했다라고 고백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다. 그리고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라고도 하셨다.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만이 가장 
우세하고 참되다라고 생각한다. 가장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석가모니불은 진리를 찾아 세상의 부와 명예를 포기했지만 얻은 것은 
무엇이었일까? 비우는 것이었다, 나를 버리면 무엇인가를 채워야 하는데 
착하고 바르게 사는 것 밖에는 없다. 그러나 그 끝은 사망이다.




허공에는 메아리라도 돌아 오지만 빗나간 진리찾기는 사망의 길로만 내닫는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라고 하셨다. 

종교인들이 착하고 바르게 사는 삶을 실천했다면 현실이 이리도 각박하고
혼탁해 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경은 말씀하신다. 사단마귀를 잡고 나면 
하나님께서 통치 하실 날이 있을 것이라고.....

진리도 없는 사망의 늪속을 헤매지 말고 생각의 사고를 바꿔보자.
생명의 샘이 폭포수같이 솟아 날 것이다. 언젠가는 종교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
평화의 세상이 되면 하나가 될 수 밖에 없다.

진리를 소망하시나요? 생각의 문을 열어 보자. 진리는 아주 가까이에 날개를 
펼치고 있다. 손만 뻗으면 되는 것을 타인의 눈치때문에 망설이고 계시다면
작정하자. 길이 아주 가깝다고 하지 않는가?
생사복화는 본인이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이래도 주저할 것인가?









2018년 2월 10일 토요일

반석같은 믿음은 무엇으로 짓는가?



어리석은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지혜로운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라고 
하셨다. 조석으로 변하는 심리가 어떻게 해야만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집 즉 반석같은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라고 하셨다. 재림을 막연하게 기다리는 신앙인들이 상고해야만, 
깨달아야 할 대목이 아닐까? 진리이고 생명이신 예수님은 계시지도 않은데 
그림자만 붙들고 맹신하고 있으니 종교계는 타락과 부패의 온상이 되어 있다. 

예수를 팔아 자기들의 이속만 챙기고 있으면서 거룩한 척 한다. 신앙인들이 
문자에 매여 하나님의 뜻과 생각과 계획은 외면하고 자기나름의 신앙을 하고 
있다. 이래서야 어떻게 반석같은 믿음의 집을 지을 수가 있을까? 




맹신과 어둠의 올무에 갇혀 자칭 신앙을 한다고 떠들어 대서야 어디 참 하나님께 
사랑을 받을 수 있겠나?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도 빠진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것이 없으리니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다라고 하셨다. 무지한 자들은 신천지를 짜맞춘다고 이상한 곳이며 이단이라고 
쑥덕인다. 무엇이 참일까? 

예언도 그 이루어진 실상도 모르는 무식쟁이가 감히 하나님께 대적하는 헛소리들을 
한다. 우아한 전통은 역사를 고집하면서 짝도 못 맞추나? 성경을 들고 다니기만 하라고 
주신 책이 아닐진데 너무도 뻔뻔하고 어이 없지 않은가? 





유황불못의 심판이 두렵다면 각성하고 회개 해야 한다. 모두가 구원 얻기를 바라고 
원하고 계실 때 말이다. 죽어서 가는 천국을 소망하지 말고 이 땅에 임하여 오실 
천국을 소망하자. 

산 골짜기의 뼈들도 생기가 들어 갔지만 소망은 없다라고 하셨다. 무덤을 열고 
생명을 찾아 유월하는 기적을 만들어 보자.반석 위에 굳게 세워진 믿음의 신앙인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2018년 2월 9일 금요일

진리의 성읍, 아름다운 신천지로 나아 가자!



비가 오신다. 꽤 이른 봄비는 아닐까? 덕분에 출근길 차가 밀린다. 왜? 비는 
오신다는 존칭으로 표현 했을까? 단순한 자연의 섭리라고 당연시 할 수도 있지만 
비를 오게도, 멎게 하는 분이 계시다면 단비는 감사와 장마는 또 얼마만큼의 
원망들을 쏟아낼까? 

사람의 능력으로는 불가한 것을 잣대를 대고 평들은 갑론을박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짐승에 비유하고 있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기 때문에 상관이 없다라고 하겠지만 호흡을 하고 계시다면 예외는 없다. 
옥에 있는 영들까지도 포함이 된다. 두렵지 않은가? 





뜬금없이 비타령을 하면서 성경을 운운하는가?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위의 가는 비요 채소 위에 단비라고 하셨다(신32:2~참고). 
하늘은 귀를 기울이고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다. 비나, 하늘이나, 땅의 숨은 
뜻을 알지 못하면 어떻게 해석하여 알 수 있을까? 

성경을 다독하고 필사를 하기 전에 먼저 감춰 두신 비유로 부터 자유롭기를 권면한다. 
신앙의 년수가 오래면, 모태신앙이라고 자부하면 뭐하나? 밤의 미혹에서 벗어나자. 
이제 얼마남지 않은 하나님의 역사는 마침표를 찍으려 하신다. 진리의 성읍 아름다운 
신천지로 나아 가자! 서두르자. 천국에 속하려면 말이다.










2018년 2월 8일 목요일

온전한 것과 내세의 능력은 무엇일까?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증거한 것이 폐하고 얼굴과 얼굴을 
대해 본다고 바울이 기록하고 있다(고전13: 9~12절 참고). 
온전한 곳은 어디일까? 그리고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할 수 없다라고도 하셨다(히6: 4~6참고).  
이 내세의 능력은 무엇일까? 약속의 목자께서는 말씀하신다. 

온전한 곳은 예언이 이루어진 실상을 말한 것이며, 내세의 능력은 약속한 
예언이 육신이 되어 나타낸 것 곧 요한 계시록의 성취와 그 실체들이라고 
하신다. 신약의 약속이 계시록일진대 이를 이룬 것을 보고도 믿지 않는 자는 
거짓 신앙인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뜻도, 예언도, 실상도 믿지 않는 자가 신앙을 한다고 말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 신앙인의 현실은 어떠한가? 참을 이단이라고 폄하하고 비방하는 
한기총과 CBS방송의 편파 행위는 과히 가관이 아닐 수 없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표현이 부족하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생들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기에 
인내하며 기다려 주시는 것이다. 온전한 곳이 이루어져 얼굴과 얼굴을 볼 때에 
약속한 것들을 보지도 알지도 못한다면 어찌 신앙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온전한 것과 내세의 능력을 비판만 하지말고 추수되어 인맞아 12지파에 속하여 
생명나무의 잎사귀가 되어 만국을 소성시키는 제사장의 반열에 들 수 있도록 
신앙의 눈높이를 가늠해 보자. 천국은 결코 멀리 있지도, 말로만 갈 수도 없는 
곳임을 깨달아 구원에 이르는 길을 찾아 나아 오기를 간절히 기도한다.